6일 새벽 히로시마에서 원폭 투하 76주년을 맞아 ‘원폭 희생자 위령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선 묵념을 위한 사이렌이 울렸고 마쓰이 카츠미 히로시마 시장과 생존자들은 세계에 핵무기 폐기를 호소했다.
76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해 종전을 맞이했지만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참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핵을 만드는데 일조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예견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상대성이론)을 찢었을 것”이라며 후회하기도 했다.
원자폭탄은 어느 정도의 위력이기에 수십만명을 죽게 만들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냈을까.
'독일 핵무장' 우려로 시작된 '맨해튼 계획'
원자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로 핵분열탄이라고도 부른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가장 핵물리학이 발달한 나라였는데 우라늄에 의한 핵분열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독일에서 나왔다. 마침 독일은 세계 최대 우라늄광이 있던 자이르와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게 됐고 독일이 핵을 개발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에 당시 최고 물리학자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미국 맨해튼 계획이 시작됐고 핵무기 개발이 시작됐다. 이후 많은 시행착오 끝에 미국은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너무 잔인해" VS "진주만 복수하자"
당시 핵무기가 있었지만 인도적인 이유와 혹시나 불발이 나서 기술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용을 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 포고도 없이 이뤄진 진주만 공습으로 1812년 독립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공격 받은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가 쌓여가며 핵을 떨어뜨리자는 여론이 높아져 갔다. 특히 수많은 아들들이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었던 상황이라 일본 본토에 상륙해 점령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결국 많은 논의를 거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가 결정되고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현지 시간) 미 육군 항공대 제509 혼성전대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 폭격기 에놀라 게이는 히로시마 상공에서 우라늄 235로 만들어진 원자 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살상을 목적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사례다. 사망자는 초기 폭발로만 7만 명이 사망했고 이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수십만명에 달한다.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으로 구성된 두 번째 원자 폭탄 ‘팻 맨’이 투하됐고 약 7만명의 시민들이 당일 사망했다.
원래 고쿠라에 떨어질 폭탄이 나가사키에?···日 "무조건 항복"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폭격지로 선정된 이유는 목표 선정 위원회에서 일본의 도시들을 뒤져 보다가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를 선정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전이 되던 도시여서다. 특히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아 원형이 유지되던 곳이었다.
나가사키의 경우 원래 제1 타격지는 고쿠라여서 당일 고쿠라 상공으로 갔으나 날씨로 인해 시계 확보가 어려워 폭격을 포기하고 제2 타격지인 나가사키로 향했다. 나가사키도 처음엔 구름이 많아 시야 확보가 어려웠으나 연료가 떨어져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고 복귀하다가 무거운 폭탄을 바다에 버려야 하는 상황까지 생각한 기장이 구름이 사라진 찰나의 순간에 독단적으로 판단해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이 두 폭격을 계기로 일본 군부는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잃었고 1945년 8월 15일 정오, 옥음방송이라 불리는 쇼와 덴노의 방송을 통해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함을 선언했다.
핵 관계자, 피폭 피해자 향해 "사과할건 당신이지"
원폭 투하 작전에 참여했던 미군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까.
이에 대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 폭격기 에놀라 게이의 기장 폴 티비츠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잡니다"라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 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또 2007년 사망하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했다.
나머지 대원들도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고 후회한 적이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원폭 개발에 종사한 과학자이자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서 버섯구름을 촬영한 해롤드 애그뉴 박사도 투하 60년 후 피폭 생존자들과 만났지만 “저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생존자를 가리키며)사과해야 하는 건 저 사람이죠. 저는 사과하지 않아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주만을 잊지 마라"며 오히려 생존자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76년이 지난 지금 생존자들은 80대의 고령의 나이가 됐다.
곽도훈 기자 kwakd@e-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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